하모일기

하모일기01. 동거 한달째

어띠 2020. 10. 25. 16:06

 

 

동거한 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도 문득 이질적인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여느 때처럼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며 스킨이나 로션 따위를 바르고 있는데 문 뒤에서 나타난 강아지가 갑자기 낯선 것이다.

'우리 집에 웬 강아지가?!'

하지만 이 강아지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고, 잠깐의 헤어짐도 아-주 길었던 것처럼 세차게 꼬리를 흔든다.

그러면 잠깐 꿈을 꿨다가 깨는 기분이 든다.

 

 

 

 

 

 

 

 

 

 

 

 

 

 

 

요즘 남편에게 이렇게 해, 하지 마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 하모 이제 잘 시간이니까 만지지 마.

- 여러 번 말하지 마.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해.

(써놓고 보니까 드럽게 싸가지 없네.. 지가 강형욱이라도 됨?)

좋은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명목 아래 정작 남편을 못살게 굴고 있는 것이다.

반성해야지. 최소 하루에 세 번 정도는 너 자신을 돌아보아라....

(근데 '앉아'라고 연달아 네다섯 번 말하는 건 그냥 보고만 있기가 힘들다^_^)

 

한 두 번의 실수로 강아지의 성격이 좌우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나는 혼자 조급하다.

조급하고 치졸하다. 내로남불 그 자체다.

그런 나를 남편은 지켜 봐준다.

리둉.... 유어 마 선샤인,,

 

 

 

 

 

 

 

 

 

 

 

 

 

 

 

며칠째 잠옷을 짝짝이로 입고 있다.

이하모가 내 잠옷 바지를 찢어벌임..^_^

엉덩이 쪽 약 20센티, 복구 이즈 임파서블.

그냥 사면되는데 괜히 찔찔대며 '나는 이하모꺼 산다고 잠옷도 맘 편히 못사ㅠㅠ' 하면서 이하모 탓할 거리를 하나 더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네이버쇼핑 장바구니랑 찜에는 하모 관련 물건으로 그득한지 오래.

뭐.. 엄마들이 내 옷살 돈으로 자식 먹을 거 하나 더 맥인다 코스프레라도 하고 싶은 걸까.

지지리 궁상떠는 꼴 보기 짜증 나서 바로 주문해버림^_^

 

지금 보니 어쩌다 저걸 샀을까 싶네 (이하모 때문인 듯)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입기 싫엏

 

 

 

 

 

 

 

 

 

 

 

 

 

 

 

집 구석구석이 엉망이다.

오늘은 꼭 화장대를 치워야지,

하모는 하루하루 자라고 있어서 언제 내 화장대를 휩쓸어버릴지 모를 일이다.

 

버뜨, 아이러니하게도.. 화장대나 침대를 짚고 서서 내 물건을 꺼내려고 끙끙거리다가 마침내 하나를 입에 물고 거실로 총총 걸어갈 때의 그 발걸음은 세상에서 제일 귀여움 (뒷모습에서도 신남이 느껴진다)

이러다가 잠옷 바지도 파괴된 것임

강아지는 잘못이 없다...

절대로 파괴하면 안 되는 것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공간에 두어야 한다..!

 

 

 

 

 

 

 

 

 

 

 

 

 

 

 

한 달 중 절반 이상의 날들은 하모(+바깥양반)를 미워하며 지냈다.

그 무엇보다도 속박되는 걸 못 견뎌하면서도 '보호자'라는 타이틀을 자처한 나를 탓하는 대신 말썽 부리는 게 당연한 이 어린아이와 입양에 조금 더 적극적이었던 남편을 미워하기로 한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그토록 바라 왔던 '나의 강아지'가 어쩌다 애물단지가 된 걸까.

열렬히 비난했던 사람들에 내가 속해버린 것 같아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동요했다.

애 닳고, 어쩔 줄 몰라하고, 속을 끓였다. 시시한 걱정부터 근거있는 걱정까지 걱정을 줄줄 달고 살았다.

한편으로는 많이 웃고 즐거워도 했다. 털이 북숭한 이 생명체는 귀여워도 너무 귀여우니까.

 

귀여운 건 크게.. 크게.....줌줌.........
ㄱㅐㅇr련,,,

어떤 대상을 상대로 이토록 열렬했던 적이 언제였더라. 마지막 연애도 이러진 않았는데 (남편 먄. 기억이 희석돼서 그럴 수도 있음)

감정 널뛰기가 엄청나다. 그래서 속병이 난 거다.

근데 지나고 보니 보름 정도일 뿐이었다. 단지 이런 감정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 것이었다. (중딩 이후로 처음..)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그 자체였던 나는, 주말 저녁 메뉴나 이번엔 어떤 치약을 사볼까 따위로 심도 있게 고민하는 인간이었으니까.

바뀐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새로운 균형이 필요했고, 다행히 이제는 제법 찾은 듯하다. 그러길 바라고.

그동안 나대로 (팔푼이처럼)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건 함께 하는 이의 존중(과 적절한 무관심의 믹스매치)이 있었음을 여실히 느낀다.

그래서,

결론은

리둉, 이하모 사랑해(하트)

 

 

 

 

 

 

 

 

 

 

 

 

 

 

 

아빠의 손길이 너무 신나는 이하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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